To explore new physics phenomena of low dimensional materials
with a special emphasis on two-dimensional layered structures
몸을 다스리기 시작한지 어느덧 2개월이 넘어선다. 주말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쉰다. 가슴 답답함도 심장이 빨리 뛰는 것도 어느 정도 수그러졌다. 이번 주말에는 답답해 골프연습장에 가서 2시간 이상을 휘둘렀더니 손목이 시큰하다. 그래도 버티니 다행이다. 아침운동에도 익숙해졌다. 올라오는 것도 없다. 몸이 적응한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공항에 오니 너무 일찍 도착한 것 같다. 라운지에 앉아 지난 몇 달간 나는 무엇을 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올해가 벌써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유난히 빨리 간 느낌은 아마도 명견만리, 잦은 해외출장이 큰 몫을 한 것 같다.
바쁜 반면 마음이 허한 것은 왜일까? 바쁜만큼 알찬 마음이 없는 것은 아마도 내가 잘못 산 것일 것이다. 몸이 나아졌으면 마음도 풍족해야 할텐데 그렇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욕심이 많아서인가.
요즈음 들어 특히 학생들이나 연구원들이 오면 짜증이 많아졌다. 모든 사람들한테 그런 것은 아니지만 특히 발전이 없는 학생들을 보면 더욱 그 증상이 심하다. 인내심이 없어진 것이다. 왜일까. 내가 정말 워크홀릭이 되어버린 것일까. 언젠가 영화에서 본 것처럼 사람이 와도 컴퓨터로 일을 하며 대화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나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 주인공을 사람들은 워크홀릭이라 불렀다. 사실 일하며 대화하는 것은 대화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한다. 그냥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은 것이다. 아니면 일에 중독이 되어 그런 것일까.
왜 조바심을 낼까. 사람마다 능력이 다른데 왜 빨리 따라오지 못한다고 화를 낼까. 내가 화낸다고 그들이 빨리 따라올 수 있을까. 틀림없이 나의 이런 행동은 상황을 악화시킨다. 학생들은 내가 그럴수록 나에게 접근하지 힘들 것이다. 그러고도 대화하지 못한다고 학생들을 나무랄 수 있을까. 참으로 한심한 나다. 잡에서도 이 문제를 가지고 마누라와 다툰다.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 태도의 문제인지 능력의 문제인지 확실치 않다. 능력이 안 되어 못 따라오는 것은 할 수 없지만 열심히 안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마누라의 그런 태도 때문에 질려서 학생들을 너무 다그치는 것은 아닐까. 많이 노력할수록 많이 느낀다고 주장하는 나의 태도, 그렇게 죽을때까지 노력하는 것이 우리한테 주어진 명제라고... 그런 나의 태도 때문에 더욱 학생들을 몰아 세우는 것일까. 학생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을텐데... 성서의 달란트의 이야기에 난 자기당착을 범하고 있지는 않을까...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놓고 주인이 돌아올 때 도로 주인한테 준 것이 정말 그렇게 잘못된 태도일까. 주인의 의도를 따르지 않았다고 게으른 종이라고 나무란 주인의 태도가 꼭 옳은 태도일까.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우리한테 전하는 메시지일까.. 게으르지 말라는 것...
그러나 사람이 어찌 논리로만 움직이는 동물인가. 만일 그렇다면 역사에서 반복되는 사건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역사를 그렇게 배우면서도 우린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거친다. 조선시대에 왕이 어리다는 이유로 그 어미가 수많은 대리정치를 하며 나라가 썩어갔다. 역사극을 보며 우리가 갖고 있는 모순에 몸서리치지만 그런 일이 또한 버젓이 이 현대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런 것을 눈에 보고도 어찌하지 못하는 우리의 단면을 보면서 우린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된다. 나의 모습 또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연구원들과의 대화를 강조하면서 스스로 대화의 길을 막고 있는 내 모습이 좋은 연구자의 모습이 아니다. 좋은 선생이 되고자하는 마음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나의 인내와 성찰이 부족한 탓이다. 책임자란 모름지기 스트레스를 받아도 그것을 아랫사람에게 전달해서는 안된다. 그래서는 모두가 스트레스로 쓰러질 것이고 일의 능률도 오르지 않을 것이다. 너무 일의 능률에 집착하는 것도 좋은 태도가 아니다. 인간이 그렇게 논리적으로 생겨 먹지 않은 탓이다.
연구원들에게 교수나 연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실적이 필요하고 이제까지 실적이 부족하면 연구환경이 좋은 이곳에서 분발하여 실적을 쌓으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안하는 것은 본인의 선택이지 나의 문제가 아니다. 아니 이제까지 자기가 살아온 패턴을 바꾸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닌데 난 너무나 많은 것을 바꾸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나의 패턴을 바꾸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내가 학생일때는 얼마나 잘했을까. 이들은 그 시절 나보다 훨씬 잘하고 있지 않은가. 난 언제 PRL 논문을 썼을까. 내가 언제 내가 연구하고 있는 분야가 얼마나 중요하고 과학 발전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알고 했을까. 새로운 연구 분야를 언제부터 심각하게 개척했을까. 이들이 이런 나의 과거보다 훨씬 더 잘하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초조할까. 얼마나 더 잘해야 내 조바심이 없어질까. 대학에 자리가 하나 비면 수백명의 지원자가 몰리고 그들의 실적을 보면서 우리 연구원들에게 조바심을 내는 것도 내 문제일 것이다. 이런 현실은 그들에게 더욱 심각한 문제지 나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대도 왜 내가 조바심을 내는가. 모두 힘들다고 불평한다. 불평도 그들의 몫이다.
과연 시련없이 나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의 일은 관계에서 시작한다. 학생과 나의 관계도 만남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서로 부딪히면서 우리 모두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련이라는 것이 온다. 한계에 도달하면 느끼는 벽... 그러나 그 벽에 도달했다는 것은 이미 그런 노력을 했다는 증거.. 거기서부터 시련기이다. 그 벽을 깨기 위해서는 내가 변화해야한다. 이제까지 나로부터의 변화가 그리 쉬운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시작할 때의 마음을 그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제 자리에 머문다. 변화하기란 고통이 따르니까. 그 시련없이는 벽을 깰 수 없다. 내가 깨져야 한다. 이런 때는 시작하는 내 마음을 다시 돌아보고 마음의 각을 세워야한다. 누구나 항상 강할 수는 없다. 살면서 둥그러지게 되고 마음의 각을 다시 세우지 않으면 항상 굴러내린다. 이 마음의 각을 세우는 것이 나의 역할이 아닐까.
그러나 그러기에 내가 적합한 사람일까. 아니 적합한 사람이기를 따지기전에 주어진 이 일을 난 어떻게 현명하게 헤쳐나갈까. 내 마음의 각을 세우고 다그치고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비난보다 배려하는 마음, 격려하는 마음으로 대할 수는 없는 것일까. 흔들리는 앉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래서 공자는 중용의 덕을 강조했을까. 아니 이런 일이 가능이나 한 것일까. 템플스테이라도 해서 내 마음을 잡을 수 있을까. 이것이 내가 가진 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