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에는(?) 눈이 부시도록 노오란 은행나무가 세상의 모든 인위적인 색깔을 비웃었나 싶더니 뉴욕을 갔다오니 벌써 겨울이 되어 버렸다. 세월이 눈이 돌만큼 빠르게 지나간다. 시드니의 파란 하늘이 우리의 초가을 하늘을 연상시켰지만 그것도 잠시 또 시간의 쳇바퀴 속으로 들어와 돌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공대 뒷길의 메타스퀘어 나무도 올해는 무던히도 속 깊은 색깔을 낸다 싶었는데 어느새 가지만 앙상히 남아있다. 이런 가을이 또 올까 싶지만 이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지나간 순간은 다시 오지 않으니 말이다. 그저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사는 수 밖에...
우리 학교의 상징은 은행나무다. 중생대 때부터 살아남은 식물이니 오래된 상징일 것이다. 아니 아마도 그 오랫동안 살아남았으니 그 자생력 또한 으뜸이요 도로와 같은 최악의 환경에서도 그 노오란 색깔을 뽐내고 있으니 마치 진흙속의 연꽃이랄까 고고함이 또한 일품이다. 또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 아시아에만 번성하고 있으니 동양의 유일성이 또한 성균인의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은행나무의 진기한 면은 또 다른 곳에 있다. 오래전 충청도 어디인가 산 중턱에 자라고 있는 6백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를 본적이 있다. 나무 밑동의 직경이 몇 사람이 둘러도 모자랄만큼 컸다. 하기야 그 우거진 은행잎을 살릴려면 그래야 될 것 같았지만 더 신기한 것은 나뭇가지가 자라 다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큰 밑동으로도 모자라 우거진 은행잎을 살리기 위해 나뭇가지조차 뿌리로 이용한 것이다. 물이 부족한 산 중턱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물을 최대한 흡수하기 위한 생존 전략일 것이다. 그것이 중생대부터 살아온 전략일까.. 그냥 잎 숫자를 적게 유지하고 살아남을 수도 있을텐데 열매를 최대화하기 위해서 가지조차 사용하는, 최대한의 에너지를 흡수하여 최대한 열매를 맺는 생존전략, 즉 최대 공약수의 법칙이다.
소나무는 살아남기 위해 잎의 크기를 최소화시켰다. 잎사귀의 모양도 원통형으로 다른 나무와 사뭇 다르다. 원통형은 햇빛을 최대한 산란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또 껍질이 두꺼워 수분의 탈수화를 최소한 시킨 것 같다. 덕분에 수분이 부족한 겨울에도 파란 색을 유지할 수가 있다. 수분이 부족한 바위 위에서도 자란다. 가끔 바위 틈새에 자라는 소나무를 볼라치면 가엽기조차하다. 그래서 바위산이 많이 우리나라에 소나무가 번성한 이유일 것이다. 최소한의 에너지로 적게 쓰고 살아남는 전략, 곧 최소 공배수의 법칙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생존전략이어야 할까. 우리는 지금 미친 듯이 효율을 최대화시켜 달리고 있다. 에너지를 가득 싣고 달리는 폭주기관차처럼. 모든 나라들이 이 경주에서 뒤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모두 한걸음 뒤지면 다시 앞설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연구도 일년을 놀면 그 분야에 다시 복구하기 어렵다. 그만큼 세상이 빨리 변하고 있는 것이다. 에너지의 문제는 무한히 존재하는 것 같지만 결국 유한하다. 아무리 만들어도 소비를 쫓아갈 수 없다. 결국 소비패턴을 바꾸어 최소화하지 않는 한 인류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결국 소나무와 같은 최소공배수의 법칙과 은행나무와 같은 최대공약수 법칙을 병행하지 않는 한 우리 인류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