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explore new physics phenomena of low dimensional materials
with a special emphasis on two-dimensional layered structures
| 요즈음 학교가 교수승진제도 개선문제로 술렁인다. 교수들의 대응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인문대학에서는 성명서도 냈고 물리학과 교수들도 성명서를 준비하느라 부산하다. 평소에는 별로 서로 내통하지 않으면서 교수승진제도개선에 대해서는 모두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행동들이 내게는 그렇게 곱게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아마도 이 일이 우리가 그렇게 욕했던 국회의원들이 할 일도 하지 않으면서 국회를 공전시키다가 자기를 월급을 올린다는 안은 금방 통과시켜 버리는 것과 같은 비슷한 씁쓸한 느낌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내일부터 명절 휴일이라 건물이 조용하다. 난 이런 분위기가 좋다. 학생들도 없고 나만의 시간이 있어 좋다. 논문을 보지 않아도 되니 내 마음대로의 시간을 가져본다. 이 시간 그렇게 떠드는 교수들은 모두 어디 있을까. 그들은 논문 하나 잘 쓰기 위해 밤늦게 연구실에 남아보기나 했을까. 그 아침의 신선한 공기를 느껴보기나 했을까. 아침까지 논문을 끝내고 난 그 개운함을 알기나 할까. 데이터 하나를 잘 구하기 위해 얼마나 고민을 했을까. 대학원생이 가져오는 데이터를 잘 해석하기 위해 얼마나 고민하고 더 좋은 데이터로 만들어 더 좋은 저널에 내기 위해 얼마나 고민을 했을까. 좋은 저널에 논문이 되지 않아 학생과 얼마나 좌절을 겪어 봤을까. 데이터 때문에 밤새 고민해 잠을 못 잔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학생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그들과 부대꼈을까. 교수의 본연의 임무가 교육과 연구의 매진에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한 것일까. 그들은 정말 학생들과 밤을 세워 실험하고 고민한 적이 있을까. 그렇게 철저하게 부딪히며 교수생활을 했다면 난 그들의 목소리를 이해할 것이다. 아니 아마도 나도 그들의 목소리에 화합해 더 큰 소리를 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목소리들이 나한테는 공허한 메아리로 들린다. 이것은 나의 오만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그러기를 바랜다. 난 묻고 싶다. 과연 지금 그런 목소리가 학교 발전을 위한 것이냐고 아니면 교수 자리 철밥통을 위한 것이냐고... 우리는 교수승진제도는 미국의 제도를 따르고 있다. 소위 정년보장제라는 것이다. 정년보장을 받기 위해 처음 조교수 5년동안 본인의 실적을 쌓기 위해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한다. 이때 이혼하는 교수도 많다. 그만큼 통과기준이 높아 보통은 떨어진다. 일단 정년보장이 되면 평생을 보장받는다. 교수가 깽판쳐도.... 교수가 정년보장이 되면 일단 두 부류로 나뉜다. 그대로 연구를 계속하는 사람, 연구를 포기하고 교육에만 충실하고 가정에 충실한 사람... 아마 정년보장 받기위해 쏟은 노력을 계속하기에는 힘이 부쳐 그냥 가정에만 충실겠다고 선언하는 경우도 많다. 나도 그런 사람을 봤다. 그런데 이제 그것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는 대학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년이 되어도 대학에서는 계속 교수의 실적을 살펴보고 실적이 나쁘면 수업시간을 늘이거나 다른 행정업무를 보게 한다. 그렇게 따라오지 않으면 점점 더 강도 높은 요구를 하고 결국은 스스로 버티지 못하고 퇴직한다. 우리도 겉으로는 이 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다만 승진 기준이 다르다. 너무 낮아 정년심사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거의 없다. 3년전 연구소를 시작하면서 나도 처음으로 교수승진기준을 쳐다봤다. 우리학교 모든 과의 기준이 너무 낮은 것에 대해 경악했다. 다른 경쟁대학에 비해 적어도 몇 배는 낮았다. 왜 교수직이 철밥통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교수들이 왜 기를 쓰고 기준을 낮추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임을 어찌 모를까. 내가 서울대 교수보다 못하다고 하면 모두 핏대낼 것이다. 그런데 우리대학이 서울대보다 승진기준이 낮다고 하면 침묵한다. 왜 그럴까. 낫 부끄러운 일이다. 요즈음 승진심사제도 개선에 대해 난 할 말이 없다. 연구소에서는 이미 이런 기준의 차이를 인식하고 미리 고쳤다. 반발이 많지만 그것은 대수가 아니다. 교수승진기준을 교수보고 정하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마치 국회의원이 모두 모여 자기들 월급 올리는 법 통과시키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미국에서는 board of trustee 즉 이사회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한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정작 조교수 부교수 승진보다 더 큰 문제는 정년이 보장된 교수들이다. 한마디로 철밥통인 것이다. 내가 총장이라면 난 정교수가 더 열심히 하는 제도를 강구할 것이다. 한 과의 실적을 보면 정교수들이 보통 점수를 깎아 먹는다. 교수가 열심히 하지 않고 어떻게 젊은 사람들에게 열심히 하라고 할 수 있을까. 좋은 과는 나이든 교수들이 잘하고 젊은 사람들은 그런 선배를 보고 더욱 열심히 한다. 내가 아는 젊은 교수는 자기 과에 노벨상 수상자가 있다는 것을 정말 자랑스러워하고 그들로부터 배우려 한다.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교수가 논문 쓰는 기계냐고 성토한다. 아니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비젼 2020이라는 당면과제가 있다. 대학이 상아탑인 동시에 시대의 부름도 있는 것이다. 성대가 점점 자라 학교의 목표대로 사학 1위를 항해 노력하는 것을 젊은 교수들은 자기들 목표라고 인지한다. 이들에게 일할 동기가 생긴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젊은 교수들을 보고 우리대학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좋은 인재들이 모이면 우리는 발전하는 것이다. 학교의 역할은 이런 교수들의 사기를 더욱 올려주고 연구를 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교수가 연구 안해도 되는 현실일까. 우리 선배 교수들은 연구를 하고 싶어도 시설이 없어 하지 못했다. 그 때는 그 분들에게는 학생들만 보였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생각이 있는 교수들에게는... 덕분에 난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그분들이 연구도 잘하는 분들이었으면 아마 난 연구에 대한 눈을 더 일찍 떴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연구도 잘해야 더 좋은 교육을 실시할 수 있다는 말도 될 수 있다. 또 대학원생을 지원하는 BK21 프로그램을 소속과에 유치하기위해 교수 논문실적이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을 유치하지 못하면 대학원생의 재정지원이 어렵고 따라서 좋은 대학원생이 오지 않고 그러면 교수가 논문 쓰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대학원생은 단순한 연구 노동력 문제가 아니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져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난 새로운 대학원생을 볼 때마다 이 학생이 실험실에 들어와 어떤 기발한 일들을 수행할지 항상 기대가 된다. 꿈을 꿀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마치 물을 주고 어떤 형태의 열매를 맺을지 상상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모든 일이 물려있는 것이다. 그러니 논문 쓰는 기계라 스스로 자조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해석할 일이다. 승진기준 가화는 그런 의미에서 나를 채우는 족쇄가 아니라 나를 게을리하게 하지 않는 안전장치인 것이다. 고등어를 잡아 서울까지 가져올 때 모두 죽는데 수조에 천적 한마리를 넣어놓았더니 고등어가 모두 살아 있었다는 어느 운전사의 이야기는 나에게는 결코 흘려 버릴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인간도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내버려두면 천성대로 게을러진다. 사실 이번 제도의 더 큰 문제는 이런 면에서 볼 때 승진기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센티브 제도 개선에 있다. 인센티브란 잘하는 사람에게 더 많이 주는 것이 인센티브의 취지다. 인센티브도 교수들이 가져오는 연구비중 오버헤드이니 많이 가져오는 사람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것이 너무 당연하고 이제까지 그렇게 진행시켜왔다. 그런데 개선안은 인센티브를 균등화하려고 한다. 각 단대에 돈을 할당하면 이미 그 자체가 균등화하는 것이고 단대에 보내면 학장이 다시 균등화할 것이 뻔하니 인센티브의 의미가 당연히 퇴색된다. 어떤 말로 포장해도 결과는 그렇다. 이는 젊은 연구자들의 사기를 꺾는 일이기도 하다. 그들이 연구비를 많이 가져오기 때문이다. 젊은 교수들은 월급이 많지 않아 당연히 이런 인센티브를 환영한다. 집에서 환영받기 때문이다. 어쪄다 가져가는 인센티브로 선심을 쓸 수 있고 자존심도 내세울 수 있다. 실험실 학생들과 소통도 중요한데 식사비도 이렇게 마련하는 것이다. 내가 젊을 때 아들은 내가 무엇을 잘해 상 탔다고 하면 질문이 ‘그래서 뭐가 나오는데?’ 하고 물었다. 할 말이 없다. 가난한 아버지 직업이 별로 호소력이 없는 것이다. 논문을 쓰는 것은 교수의 임무이니 더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더 많이 쓰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승진 기준을 정하는 것은 대학 당국의 몫이다. 안 쓰면 그 대학교수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거기에 맞는 직장을 선택하면 된다. 대학은 대학의 발전을 위해 계획을 세울 수 있고 이런 요구를 당연히 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수들의 사기를 올려주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그러지 않으면 실력있는 젊은 교수들이 떠난다. 실력없는 사람은 끝까지 남아 대학과 싸운다. 인문대 교수들은 남아서 끝까지 싸우지만 자연대 교수들은 떠난다. 그 생리 차이를 대학당국은 왜 모를까. 그러면 그 대학은 망한다. 그렇게 망한 대학을 많이 봐왔지 않은가? 제발 성명서 내기 전에 한번쯤 내 행동이 대학 발전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철밥통 생각을 버리고 그런 발언을 하는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