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explore new physics phenomena of low dimensional materials
with a special emphasis on two-dimensional layered structures
http://nanotube.skku.ac.kr/weekly.html 에서 옮김
2010.03.01 13:20:26
오랫동안 시도해보려 했던 템플스테이다. 다행히 수민이의 도움으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2박 3일 짧은 기간이지만 떠나기 전 이것 저것 신경 쓰느라 여간 피곤한 게 아니다. 그냥 갈수도 있을 텐데 늘 미련이다. 이런 것이 인생인가 보다.
낙산사, 전에 와 보기도 했지만 막상 와보니 실제 해변하고는 많이 떨어져 있다. 숙소는 너무 조용하다. 바다가 보이는 3곳 절 중의 하나란다. 2005년 방화사건으로 33만평 거의 대부분이 불에 탔다. 그래도 지금은 일년 전에 비해서 시설이 많이 개축되어 있다. 내가 머무는 곳은 깨끗한 목재집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좌실 화장실이 따로 있고 샤워실도 있다. 부족한 것이 없다. 방내는 옷장하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달력하나 걸려있다. 방문을 여니 향굿한 솔내음이 난다. 어렸을 때의 익숙한 냄새다. 수민이 아빠의 빽(?)으로 혼자서 지낼 수 있는 방이다. 불이 나 다 타버린 앞 산 언덕위에 볼품없이 큰 소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덩그러니 이 산사에 들어와 앉아있는 어울리지 않은 나의 모습일까. 이곳과 어울리려면 아마도 세월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늦게 도착했다고 쫓아내지 않고 오히려 산사로 전동차로 데려다주는 안내 분이 고맙다. 송현 스님으로부터 이곳의 소개를 받고 절하는 법도 배웠다. 가부좌도 배웠다. 절에 대해 설명도 들었다. 작은 주춧돌 하나 의미없는 것이 없다. 심지어 괭이가 많은 나무조차 그 모양 그대로 건축자재에 쓰여졌다. 동쪽에서 자란 나무는 동쪽 기둥에, 남쪽에서 자란 나무는 남쪽 기둥에.... 참 신기하다. 어떻게 그런 배려가 가능할까. 4천왕문만 불에 타지 않았다. 우락부락한 그들 모습에 화마도 무서워 비껴간 것일까. 육이오 때도 살아남은 유일한 건물인데 이번에도 살아남았단다. 늘 절에 가면 느끼는 것이지만 우락부락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그러면서도 친밀한 그들의 모습에서 전생에 나의 모습이지 않았을까 하고 늘 상상해본다. 부리나케 5시 저녁을 먹고 6시부터 예불에 참석하라고 했다. 원통보전에 들어가 예불 드리는 동안 108번 절하기를 권고 받았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했다. 내 마음을 다스리는데 도움이 된다니 기꺼이 해 보겠다고 했다. 소책자에 매번 절할 때마다 음미하는 108가지 글귀가 있었다. 처음에는 들어오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결국 세상의 모든 번민을 떨치고 마음을 비우라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반복되는 그 문구에서 결국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빈 손으로 왔으니 빈 손으로 가라는, 그래서 사는 동안 번민하지 말고 욕심없이 살라는 글이다.
그리 어렵지 않게 끝내고 돌아왔지만 앞무릎이 벌겋게 변했다. 도중에 송현스님과 차담시간이 있었다. 맛은 보이차와 비슷했지만 그보다 더 뒤끝맛이 좋았다. 보이차보다 좋은 차란다. 덩치는 작고 야무지게 보이지만 붙임성이 좋은 스님이다. 20년 전에 출가했으니 대단하다. 더구나 여자 분이 20대 초반에 어떻게 그런 결심을 했을까. 나도 젊어서 그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사는 모습이 자연스럽지 않아 더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내 마음 속의 조바심이 곧 내 문제임을 깨달았다. 조바심이 결국 인내심을 무너트리고 짜증나고 화나게 만든다. 하기야 내가 아무리 초조해 하더라도 모든 일에는 시간과 순서가 필요하다. 시간을 두 배로 늘리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래 앞으로 10년이 아닌 20년 동안 일한다고 생각하면 더 느긋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전에는 화를 품고 있기보다는 밖으로 배출하고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살 수 없다. 나를 보고 실망하는 눈들이 너무 많이 있기 때문이다. 화를 내기란 쉽다. 또 화는 내면 더 자꾸 내지게 된다. 습관이 된다 화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것이 내 마음속의 조바심인 것이다. 잡무로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뺏기다보면 저녁에는 화가 난다. 학생들을 볼 때도 짜증이 먼저 난다. 연구가 진척이 느릴 때도 학생들에게 짜증이 난다. 왜 좀 더 빨리 못할까. 왜 게으름을 피울까. 왜 저마다 속도가 있고 저마다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받아주지 못할까. 그것은 내가 조바심을 내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에 산길을 혼자서 걷으니 모처럼 내가 느껴졌다. 바람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가 느껴지지 않은 겨울밤, 온 누리가 아직도 눈에 쌓여 산자락에 걸린 소생달이 무척 차갑게 느껴진다. 코끝은 차갑고 귀는 얼었지만 잘 왔다는 생각이 드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