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explore new physics phenomena of low dimensional materials
with a special emphasis on two-dimensional layered structures
http://nanotube.skku.ac.kr/weekly.html 에서 옮김
2008.05.01 22:42:25
봄비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린다. 하늘은 우중충하다. 내 마음 저 깊은 곳의 또 다른 나처럼..... 누가 일요일을 Gloomy Sunday 라고 했을까.....
그런 날이다.
세상은 참으로 살기 어려운 곳이다. 지금까지 여기까지 왔지만 여전히 세상은 나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사람 사이에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사람 사이에서 무리없이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말 한마디로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말 한마디로 큰 힘이 될 수도 있다. 살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새 상대방한테 상처를 준다. 그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새 상대방이 나에게 등을 들이댄다. 그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우리는 서로 당황한다. 아무리 침묵은 금이라 했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언어라는 것을 통해서 상대방을 이해하게 된다.
실험실에서 이런 관계는 쉽지 않다. 나는 교수라는 직책으로 학생들을 대한다. 학생은 교수라는 존재를 어려워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은 다를 수 있다. 옛부터 스승과 제자는 참으로 어려운 관계이다. 스승은 모든 것을 모범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학생은 그것을 통해 배운다. 이런 관계가 과연 오늘날에도 바람직한 것일까. 교수는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강요하고 학생은 그 지식을 받는 것이 올바른 관계일까. 물론 지금의 교육철학은 이를 반대할 것이다. 나도 그럴거라고 생각한다. 나의 고민은 수업에서의 이런 관계에 있지 않다. 대학의 또 다른 기능은 새로운 학문을 개척하고 기술을 개발하여 이 사회에서 leadership을 발휘하고 또 사회 구성원에게 미래사회에 대해 희망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교수와 제자의 관계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관계가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험실에서 나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같은 수직관계는 절대로 창의성이 요구되는 실험실에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수직관계가 아니고 실험실에서 같은 연구주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수평적인 동료의식이 정말 필요하다. 이런 관계가 되지 않으면 학생은 교수한테 제대로 의견을 개진할 수가 없고 창의적인 생각이 연구에서 녹아날 수 없다.
내가젊었을 때는 사실 젊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학생들과 이런 관계를 비교적 쉽게 만들어갈 수 있었다. 술집에서 술 한잔이면 우린 동료가 되었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든 지금 (아직도 젊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내 생각이고) 실제로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이 관계를 깨려고 많이 노력하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 밖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시간이 있으면 일에 집중하려고 하다보니 학생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적어졌다. 결국 학생들은 나하고 관계가 늘 공식적인 것이 되고 딱딱해져 버렸다. 사람이 많으니 술집에 가도 대화하는 대상이 한정되어 있다. 늘 대화가 부족하다. 나를 피하는 사람이 늘 있다. 실험실에 오래 있던 사람이라도 이 관계가 발생한다. 이것은 순전히 나의 잘못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무척 미안하다. 사람의 성격에 따라 또 가정환경 주위환경에 따라 그 상황을 배려하지 못한 나의 불찰이다.
그나마 실험실에서는 나의 이성으로 이런 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가정에 들어오면 이 관계 설정이 더 어렵다. 가족한테는 말이 없어도 서로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집에 들어가면 힘들어 쉬고 싶어 한다. 이제 내 아이들도 다 대학생이다. 스스로 판단하기를 바라고 또 내 삶으로부터 보고 배우기를 기대한다. 내가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내가 열심히 사는 것이라고 위안하고 또 아이들이 그렇게 이해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가족끼리 대화는 이성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감정이 앞선다. 아이들한테는 그것이 너무 큰 부담인 것 같다. 난 아이들이 아직도 어린 아이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에 불만이고 아이들에게는 그들의 대화 상대가 되어주지 못하는 앞뒤 꽉 막힌 고집쟁이로밖에 인식이 되질 않는다.
사람에게는 다 때가 있다. 어린 아이의 유년시절, 사춘기, 그리고 성장하여 어른이 된다.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그리고 대학원 모두 긴 인생 여정의 과정이다. 다 그 시기를 마쳐야 그 다음이 있다. 나름대로의 성숙으로 이르는 과정인 것이다. 내 눈에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어린아이로 남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아이들도 그런 것 같다. 아이들 눈에는 난 이상이 없는 현실주의자일 것이다. 현실적인 것에만 급급하여 자기들을 윽박지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면 엄청난 고잽쟁이가 되어있던가.
하기야 그들이 옳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사회의 부조리에 저항하고 체제를 부정하고 맛서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 내 아들이 그러고 있는데 그런 아이를 옳지 않다고 꾸중한다. 모순이다. 내 마음이 조급해 있는 것은 아닌지... 왜 참아주지 못할까.. 언젠가 그들도 나처럼 나름대로의 답을 찾아 낼 텐데... 자기 상황에 맞는 답들을 말이다. 나도 대학생 시절 내가 왜 공부해야 하는지 왜 꼭 과학이라는 것을 해야 하는지 비록 과학이 좋아서 시작한 것이지만 과학을 공부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 앞에 선자로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박정희 시절 그 많은 세상의 부조리 앞에서 난 과학을 통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과학을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냥 공부하는 것이 사회에 대한 나의 책임회피가 아닌지... 그래서 세상을 엎으려는 생각으로 육사에 지원한 적도 있었는데...
이런 고민을 하는 세상의 젊은이들이여 포기하지 마라. 부정적인 시각보다는 긍정적인 시각을, 게으름보다는 부지런함으로, 소극적인 태도보다는 적극적인 태도로 절대 이 세상에 지지마라. 그래서 너희들 말대로 소수보다는 다수가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라. 소수가 무시되지 않고 모두가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어라. 미래는 너희들의 것이니까. 지금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조금 있어 너희 다음세대가 또 그렇게 너희를 비난할 테니까. 이 Gloomy Sunday에 나를 짓누르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내가 틀리다는 것을 보여줘라. 내가 고집쟁이로 변해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아라. 너희들이 맞는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