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explore new physics phenomena of low dimensional materials
with a special emphasis on two-dimensional layered structures
http://nanotube.skku.ac.kr/weekly.html 에서 옮김
2008.05.01 21:55:29
요즈음은 교수가 정치하는 일이 흔해졌다. 옛날에는 교수의 역할의 비판의 역할이었다면 오늘날은 참여의 역할로 바뀐 것 같다. 전에는 교수가 선비라는 개념이 강했다. 그래서 교수가 가난해도 미덕이라 여겼고 그런 교수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교수는 대학에서 강의하지만 현실 참여의 방법으로 비판을 선택했다. 정치가들이 사람들을 선동하고 암목을 흐리게 하는 꽁수를 부리면 교수는 정당하게 그들의 잘못을 비판하고 잘못되었다고 공개적으로 말한다. 전 한양대 이영희 교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직업이 비판인 것처럼 정부 비판을 많이했고 또 그것 때문에 박해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박해를 받을 때마다 국민들은 그들 편에 섰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국민을 대표해 비판을 하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비판은 대학교수 몫이었고 또 교수는 이런 핍박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월급이 작아도 존경받았고 스스로 자긍심이라는 것을 갖고 있었다. 참여하여 이득이 취하기보다는 사회의 약한 자를 대변하면서 가난하게 살기를 선택한 것이고 그것이 그들에게 최고의 명예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 역할이 바뀐 것 같다. 자본주의 사회의 최고 가치인 부를 갖기를 원하고 또 비판세력으로 남기보다는 스스로 가진 자의 편에 서서 사회를 개혁시키기를 원한다. 교수가 연구를 해도 스스로 부자가 되어야 다음 세대가 선택하는 직업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여긴다. 현 정부에는 교수 출신들이 여전히 눈에 많이 뜨인다. 그런데 그들의 이력에 많은 문제가 드러난다. 논문 표절 문제가 그 중 대표적인 예다. 이 문제는 단지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고 현역 교수들에게서도 자주 나타나는 문제점이다.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연구 논문이라는 것을 써야 하고 교수가 된 다음에도 승진의 가장 큰 걸림돌이 논문이다. 왜 이런 문제가 나타날까.
한국의 교수는 다른 선진국과 달리 교수 강의 시간이 턱없이 많다. 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잡무에 끝없이 시달린다. 그래서 사실상 연구에 시간을 투자하기가 어렵다. 연구비는 정부 GNP의 5%에 가깝도록 올리려고 노력하지만 대부분의 연구비는 회사와 관련된 연구비나 정부출연연구소의 대형사업비로 가져가 대부분 교수들의 입장에서 보면 연구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따라서 양질의 논문은 커녕 최소한의 논문 숫자를 지켜내기에도 보통의 교수들한테는 벅찬 실정이다. 여기에 정치에 관심있는 교수들의 경우 논문을 쓰기 위해 연구실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기란 사실상 어렵다. 따라서 논문 표절 문제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우리처럼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도 저녁 늦은 시간을 이용하지 않으면 논문 쓰기가 어렵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연구 효율에서 떨어지는 사회다.
그렇다고 논문 표절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황우석 교수는 또 다른 예이다. 내가 실험하고 있는 데이터에 관한 처리는 나의 정직성과 관련이 있다. 실험을 하다 보면 반드시 나와야 할 데이터가 실험의 한계 때문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 경우 실험 조건을 개선하여 그 데이터가 나올 때까지 실험해야 하는 것이 정당하고 실험결과를 재연할 수 있어야 그 데이터를 신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가끔 실험하는 학생들은 교수들의 질타가 두려워 실험 데이터를 조작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교수는 연구비지원기관의 정해진 목표와 시간에 쫓겨 학생들을 질타하지만 그 어느 경우도 데이터를 조작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아무리 연구자의 생명이 Publish or Perish라 하지만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직면할 때 연구자로서 어떤 자질이 필요할까.
나는 연구자로서의 자질이 일반 사람들의 자질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연구자의 가장 큰 덕목은 정직이다. 정직하지 않으면 이런 극한 상황에 쫓기게 되면 데이터를 조작하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이를 막는 것은 그 사람이 평소 살아온 정직성이다. 누구든지 몰리면 마지막 순간 모두 고민한다. 그러나 정직한 사람은 그 순간 정직한 선택을 한다. 또 다른 자질은 성실이다. 성실한 사람은 머리가 조금 부족해도 성실로 이를 메워준다. 머리가 좋고 성실하지 않은 사람은 연구가 어려우면 쉽게 포기한다. 연구란 것이 하루 아침에 결과가 나오지 않는 면을 고려해 볼 때 전자의 경우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 실험실에도 이런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성실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는 머리가 나빠서 생기는 문제에 비해 해결 방법이 별로 없다. 내가 지금까지 연구하고 있는 것도 아마 내가 어미니한테서 배운 성실함 때문일 것이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온 어머니가 우리를 이만큼 키워 낸 것은 순전히 어머니의 성실함 때문이다. 연구자의 또 다른 중요한 자질은 긍정적인 삶의 태도이다. 연구를 하다보면 연구의 속성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수없이 좌절한다. 그래서 쉽게 지친다. 긍정적인 태도를 갖는 사람은 이런 경우 일의 또 다른 긍정적인 면을 보고 일어서서 또 시도한다. 연구 자체가 늘 도전적이라는 속성이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긍정적인 삶의 태도는 그 사람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