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explore new physics phenomena of low dimensional materials
with a special emphasis on two-dimensional layered structures
교수와 대학원생과의 관계를 어떻게 간단히 표현할 수 있을까?
난 전에 대학원생이었으면서 지금은 교수인데도 그리 간단히 정의하기가 힘들다. 아마도 둘 사이의 그만큼 복잡한 관계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아마 애증의 관계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교수가 된지 30년이 지나 내 교수 인생이 끝이 보이는데도 말이다.
대학에 들어와 좋은 교수님을 만나 단순한 지식을 배우는 것 뿐만 아니라 연구자는 마치 구도자 같은 자세도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었고 밤새공부하는 것도 즐겨했다. 또 대학원생 동안 진짜 연구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도 알았다. 때론 안 된다는 것도 배웠다. 미국에서는 내 지도교수님한테 많이 배웠다. 단순한 교수로서가 아니라 친구 또는 동료로서 연구하는 법을 배웠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도 연구하는데 중요한 덕목이란 것도 알았다. 내 미국 교수한테 인생에 있어서 fairness가 중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외국인들한테도 배려하는 모습을 통해 그의 실천을 배웠다. 그가 젊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더욱 신선했다.
물론 좋은 교수만 보아온 것은 아니다. 대학교에서 조차 열심히 가르치지 않고 또 인간으로서도 자격이 없어 보이는 교수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렇게 되지 말아야지 생각했지만 생각하면 교수도 그냥 다른 사람들이어서 받아들일 수 있는데 왜 그렇게 받아들이기가 힘이 들었는지.. 대학원생때도 그랬다. 미국은 정년교수가 되면 어떤 교수는 연구 안하고 소위 말해 9 to 5만 일하고 귀가한다. 미국에서는 적어도 그런 것들을 서로 신경쓰지 않는다. 자기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나는 적어도 개인적으로 교수와의 애증관계가 없었다. 그냥 동료로서 주어진 연구를 신경썼지 그 외의 신경 거스릴 일은 없었다. 연구실 다른 대학원생 관계도 쿨했다. 잘하든 못하든 관계없이 자기 패이스를 유지했고 물론 잘못하는 학생들은 힘들어했지만 교수와의 관계는 적어도 그들에게 쿨하게 보였다.
왜 우리는 다를까.
문화의 차이일까. 내가 부임하여 교수가 되고 나는 학생들이 나를 교수님이라고 부르기를 싫어했다. 그래서 선생님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선생은 말 그대로 먼저 태어난 사람이니 그냥 선배이면 충분했다. 교수는 가르치는 사람인데 어쩐지 난 아직 그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실력이 없다고 생각했고 아직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때 아직도 어렸으니 생각들이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편했다. 학생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학생들도 술 마시면 선배님이라고 불렀고 나는 그게 좋았다. 그러다 보니 맨날 교수로 부르지 말라고 말하기도 불편하고 나이가 들다보니 이제는 교수라고 부르는 것이 그냥 관성처럼 되어 버렸다.
우리 문화에 선생은 천직이라는 말이 있다. 무슨 의미일까.
천직이란 하늘이 내린 직업이란 뜻일 것이다. 하늘이 내릴만큼 중요하고 책임도 사명도 크다는 느낌도 있다. 난 그런 사람일까. 언감생심이다. 나는 그런 사람하고는 멀다. 학생들과 아직도 스스로 싸운다. 잘못한다고 화만 낸다. 학생 입장에서 보면 니가 잘 잤으면 잘 가르쳐줘야지 뭐라고만 한다고.. 그래서 모두 속으로 투덜댈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나를 피한다. 3층은 내 연구실이 있는 방이고 우리 실험실 학생들도 있지만 많은 학생들은 다른 층으로 가고 싶어한다. 최근에는 문제 아이들을, 정확히 말하면 늦게까지 졸업하지 못한 애들을 다시 3층으로 끌어들였다. 강압이다. 싫어한다. 그래도 잘할 수 있다면..
어떤 교수는 대학원생을 노예라고 부르기도 한다. 교수가 스스로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런 측면이 있기도 하여 스스로 자괴감이 든다. 대학원생은 좋은 연구결과를 얻어야 논문을 쓸 수 있고 그래야 졸업할 수 있고 그래야 교수가 되거나 취업할 수 있다. 그러니 밤낮없이 실험을 해야한다. 나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미래에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데 노예란 끌려간다는 뜻일 것이다. 대학원생이 연구하는데 스스로게 끌려가는 것이니 그럼 노예가 된다는 뜻일 것이다. 스스로 대학원생이 노예이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스스로 연구하면 된다. 간단하다. 연구하는 것도 스스로 동기부여를 해야 하고 스스로 실험을 진척시켜야 한다. 실험할 때 스스로 연구 목표를 설정하고 실패할 때 성공으로 이끌어가는 노력을 만드는 것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물론 교수가 도와 줄 수 있다. 그것이 교수의 역할이다. 가끔은 째찍을 가할 수도 있다. 그것도 도와줄 뿐 스스로 결정해야한다. 포기하는 것도 대학원생의 선택이다. 어차피 인생은 끝없는 선택이다. 확실한 미래는 없고 그냥 선택하고 갈 뿐.. 그래서 삶은 지랄 같은 인생이다. 잘 못될 수 있으니까. 운이 좋아 여기까지 온 것 뿐이다. 운칠기삼이 여기에 정말 적합한 말이다. 대학원생이 교수를 찾아와 연구한다고 선택한 것도, 결혼하기위해 상대를 선택하는 것도, 매일매일 순간순간 선택하는 기로에도 늘 실패확률이 있다.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도 한다. 그래서 엿같은 인생이다.
그런데 다른 관점도 있다. 순간의 선택때마다 성공하거나 실패할 수 있기 때문에 인생이 재미있다. 순간순간 모험이다. 아무 선택이 없다면 무슨 재미인가. 매일 같은 반복이라면.. 이 나이가 든 나도 아직도 순간순간 선택을 하고 고민하고 순간순간 가끔 후회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걱정할 것 없다.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고 최악의 경우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면 된다. 특히 내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관계에서 선택할 경우 더욱 그렇다. 고등학교 친한 친구 경제적으로 어려워 도와 준 적이 있다. 물론 되갚지 않아도 생각하면 도움을 줄 수 있고 잘못되어도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들과의 선택에서 배우와의 선택에서도 고민이 많겠지만 최악인 경우 잘못되어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면 선택할 수 있다.
인생은 그래서 어렵다. 특히 한국에서 교수와 대학원생관계는 천직의 관계가 존재하고, 아직도 대학생과의 관계가 정말 어렵지만, 그래서 잘하면 모두 윈윈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힘들어진다. 그러나 그것이 이미 선택인 것을.. 아직도 애증관계가 있지만 우린 포기할 수 없고, 그래서 아직 우리 서로 사랑하는 한 희망이 있다. 세상 수많은 애증관계가 많겠지만 정말 서로 사랑하는 한 희망이 있다. 모든 사람의 관계에서도 적용되는 것처럼 사랑하는 한 길이 있다. 교수의 천직이란 말이 아마도 이러 애증관계가 아닐까. 싫어도 만들어 가야한다. 서로 애증이 있는 한 아직 같이 있어야 하니까. 언젠가 우리 서로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갈때가지 가보자!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라는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