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explore new physics phenomena of low dimensional materials
with a special emphasis on two-dimensional layered structures
요즈음은 과학계에서도 혼돈의 시대다. 과거 박근혜 정권 그리고 이 이전까지 시작된 60년대를 거슬러, 아니 그 이전 일본 압제이후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그 과오가 지금까지 계속되는 상황이니, 현 정부가 적폐청산을 목표로 지금까지 노력하고 있는 것은 이해가 된다. 정치는 그렇다치고 (내가 정치에 대해 잘 모르다보니 잘잘못을 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요즘 과학계에서도 관련 연구소의 기관장문제도 정치적으로 원칙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기관장의 일의 옳고 그른 이슈가 아니고 마치 정치적으로 몰아 부치는 것 같아 화가 난다. 더구나 잘하는 사람도 정치적으로 몰아세우기 일쑤이고, 문제가 있는 무능력한 사람도 정치적으로 반대로 공격하여 오히려 전도를 흐리게 하고 있다. 일을 하다보면 잘못할 수 있고 공격당할 수 있다. 오히려 아무 것도 안하고 놀고 있어 능력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마치 정치적으로 밀리면 최악의 경우가 된다. 정작 일 잘하고 있는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휘말려 일을 낭패 당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고 또 다양한 이익이 상충되어 있어 일의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의 판단이 쉽지 않다. 어디까지 옳고 어디까지 그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가치관의 혼돈이기 쉽다.
학교 내에서도 때로 일이 복잡하여 낭패하기 쉽다. N-Center에서의 일만해도 그렇다. 2000년도 초반 나노연구가 시작되던 때에 성대도 일찍 이 부분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SAINT를 만들었다. 초기단계는 나노를 활성화시키고 후반부터는 NT/BT연구를 진전시키는 장기 발전계획을 세웠다. 그 당시 SAINT를 만들고 다양한 이익관계 때문에 불편함이 있었지만 대학을 발전하기 위해 소소한 잡음은 접고 앞으로 갔었다. 15년 이상 지난 지금 상황에서 N-Center를 앞세워 (최근 2년 이상동안 건물일부가 비어 었었고) 다음 단계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action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 결과가 대학의 노력으로 최근 양자생명물리과학원 (IQB)을 신설했다. 시작할 때 사실 잡음이 적지 않았고 지금은 그런 잡음이 어는 정도 줄어들었지만 그 전에 비하면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대학 구성원의 역량도 문제려니와 옳은 것에 대한 성찰에 앞서 각자 이익이 먼저 급급하는 사람들이 생겨 잡음을 일으키니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을 하기가 쉽지않다. 처음 그때의 대학 구성원은 대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양보를 구하고 이기적인 것을 최소화시키고 헌신적으로 일을 했다. 지금에는 어디까지 밀고 가고 어디까지 양보해야하는지, 아니 정치적이기보다는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을 세우는 혜안이 필요하다. 이 부분에 대해 적어도 내 경험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지만 어디에서 그 대를 그어야하는지 쉽지 않다.
학과, 연구소 소소한 일들도 많이 일어난다. 일을 하다보면 풀기가 쉽지 않고 그런 경우 가능한 요령을 앞세워 극복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꼼수를 쓰게 되어 많은 경우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때로 너무 앞서가면 낭패를 보기 일쑤다. 많은 경우 세상을 살다보면 편법이 되어 더 나아가 불법이 되어 낙마할 수 있게 된다. 어느 경계가 어디일까. 지난주 병역특례 문제로 곤역을 치렀다. 시작할때는 필요에 의해 가능한 규정을 오해 혹은 잘못 해석하면서 요령이 이루어졌고 더나아가 편법이 되고 결국 불법으로 인정한 셈이 되었다. 모두 기관장이 모두 내 탓이지만 각자 구성원이 각자 규정을 세밀히 살펴보고 요령과 편법을 구별할 수 있었더라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책임자들은 어디까지 규정이고 어디까지 편법인지를 분별할 혜안이 필요하다. 규정은 모든 구성원이 편리하도록 만든 약속이지만 각종 규제 때문에 사실 불편하다. 그러나 편법이 일어나 피해를 보면 다른 구성원들이 불편해진다. 어디에서 편법으로 멈춰야 할지 때로는 판단이 쉽지 않다.
이런 일은 우리 연구소에서도 이런들이 쉽게 벌어진다. 우리 연구소는 많은 연구자들이 장비를 공유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전처럼 교수들은 자기 장비를 갖추면 보통의 경우 자기 장비를 귀속시키고 다른 연구자들은 장비 쓰는데 제한을 받게 된다. 정부에서도 예산을 절감하고 연구효율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모색을 꾀하고 있다. IBS를 시작하면서 각종 대형 장비를 구축하고 어떻게 하면 연구자들이 연구장비를 효율적으로 공유할까를 고민하고 있다. 장비는 IBS 소속이지만 장비슈퍼유저를 만들어 연구장비를 모든 연구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많은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슈퍼유저의 권한에 의해 일반유저가 규정을 어기면 제재를 가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제재를 떠나 시스템으로 제재를 가하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거의 예외가 없다. 그러나 가끔 일반유저의 시니어 혹은 관련 교수가 끼어들어 규정을 어기게 한다. 이런 경우 편법이 자주 발생하고 결국 서로 불편한 일들이 벌어지고 더 나아가 안전사고도 피할 수 없을 때도 있다. 방책은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다. 가능한 버텨야 한다. 그러나 정말 원칙 때문에 너무 불편하면 그때는 예외사항이 있을 수 있어 효율을 살리기 위해 감독자의 운영의 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법은 필요약이다. 여러 사람을 위해 법을 초소공배수로 최적화시켰지만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래도 불편해도 참는 이유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피해를 최소화 시키기 위해서다. 최악을 면하고 조금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버틸 수 없을 정도의 효율이 떨어지면 다시 법이나 규정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은 감독자의 결정이다. 다시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 요령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어디부터는 편법으로 넘어가는지 감독자의 의무다. 이것이 지혜다. 이전 공자는 중용을 이렇게 가르쳤지만 어디까지 최선인지는 그때 그때 살펴야 할 의무가 감독자에게 있다. 성서에서도 안식년에 음식을 먹는 예수의 비유가 들어있다. 안식년을 위한 것이 아니고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를 설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감동적이다. 나는 왜 이런 혜안이 없을까 예수님께 간구해본다.